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광주산맥 자락에 쌓은 성이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개의 산성을 쌓았는데, 북쪽의 송도,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처음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후 역사의 풍랑 속에서 숱한 전란을 겪은 현장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왕궁을 떠나 이곳으로 피난했었다. 당시 청태종은 10만 대군을 몰고 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는 인조의 항복을 기다렸다. 성 안에서 대신들은 항복하자는 의견과 죽음으로써 맞서 싸우자는 의견으로 갈라져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고 두 왕자와 많은 아녀자들이 적의 포로가 되자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난한 지 45일 만에 성을 내려와 삼전도에서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치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사방의 문루와 수어장대, 청량대, 현절사, 연무관, 지수당, 숭렬전, 부, 루, 돈대 등이 있다.
1. 수어장대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운 목조 건물이다. 성을 쌓을 당시 동서남북에 세워진 4개의 장대 중 가장 크고 으뜸으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수어장대란 이름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선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핵심 지휘 시설인 수어장대는 조선시대 군사 방어 체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던 건축물로서 단순한 누각이 아니라 전쟁 상황에서 실제로 군사를 통솔하고 지휘하기 위해 설치된 전략적 공간이다. ‘장대’라는 명칭 자체가 높은 곳에 세워진 지휘소를 의미하는데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내에서도 가장 높은 지점 중 하나에 자리하고 있어 사방을 조망하기에 유리한 위치적 특성을 갖는다.
건축적으로 보면 수어장대는 전통 한옥 양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군사적 기능에 맞게 설계된 특징을 보인다. 일반적인 정자나 누각과 달리 장식적인 요소보다는 실용성과 시야 확보가 우선시되었으며 건물 전면이 개방된 구조를 취하고 있어 주변 지형과 성곽, 그리고 외부 접근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적의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하고 즉각적인 지휘명령을 내리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항전을 이어갔던 상황에서 수어장대는 조선이 끝까지 저항하고자 했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의 수어장대는 여러 차례 보수와 복원을 거쳐 유지되고 있으며 남한산성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 역할을 한다. 특히 이곳에 올라서면 성벽의 흐름과 주변 산세 그리고 방어를 위해 설계된 지형적 특징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 남한산성이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자연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군사 요새였음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2. 행궁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1909년까지 잘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다. 1999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상궐에 해당하는 내행전을 준공하고 2004년 행궁 좌전을 준공하였다.
2-1 내행전
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으로 인조 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을 되어있고 좌우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대청을 제외한 3면에는 퇴칸을 두었고 내행전의 기동 위쪽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돌을 3단 쌓아 경사가급하고 평지가 협소한 약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장엄한 외관과 안정감을 주도록 하였다. 팔작지붕에는 용문양과 봉황문양의 막새기와를 사용하였다. 현재 내행전은 2002년에 중건되었다.
2-2 외행전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인조 3년에 준공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이 내행전 보다 작고 내행전에 비해 6m 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이곳에서 행하였으며 한봉에서 청나라 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좌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된 것으로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3. 청량대
남한산성의 청량대는 청량당을 말한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는 과정과 관련된 인물인 이회와 그의 처첩을 모신 사당으로 수어장대 옆에 자리한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신앙 공간이다. 청량당은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공사 비용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이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회는 형이 집행되기 전 '내 죄가 없으면 매가 한 마리 날아올 것'이라는 유언을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정말 매가 날아와서 다시 조사를 한 결과 누명을 벗게 되었다고 한다. 매가 날아와 앉았다는 매 바위도 볼 수 있다.
한편 남편의 공사비를 행상으로 보태오고 있던 아내는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룡도 앞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의 군사적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 행궁, 성문, 암문처럼
전쟁과 방어를 위한 시설이 많지만 청량당은 성을 쌓고 지킨 사람들의 희생과 민간 신앙이 담긴 공간이다.
남한산성 축성의 고난과 억울한 죽음 그리고 그 넋을 달래려 했던 후대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어장대가 남한산성의 군사 지휘를 상징한다면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만든 사람들의 희생과 기억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현재 청량당에는 이회뿐 아니라 송 씨 부인, 나 씨 부인, 벽암대사, 여러 장군신과 오방신장 등도 함께 모셔져 있어 민간 신앙처의 성격이 강하다.
4. 현절사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다가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숙종 25년에는 주전파 김산현과 정은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부속 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어 조선의 선비 정신을 말해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정은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주화파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져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청나라는 끝까지 전쟁을 주장한 조선의 대신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삼학사는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대신 중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참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당은 이들이 처형된 지 50년만인 숙종 14년(1688년)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1693년)에 왕은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이후 고종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모셨다.
현절사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통치경관제의 시설에 해당한다.
* 통치경관제의 시설
통치·행정과 제의(유교 제사) 기능을 수행한 건축물·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에서는 임시 수도 기능을 하는 행궁과 유교 상징성이 기능하는 제의시설(숭렬전, 현절사 등) 읍치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좌승당, 포도청터, 지수당, 연지 등이 통치경관을 구성하는 시설이다.